
조계종은 한국 불교 종단중 최대의 종단이다. 조계종은 보조국사 지눌의 선교 일치(禪敎一致)의 정신에서 출발하고 있다. 조계산(曹溪山) 북서쪽 자락에 자리잡은 송광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의 하나인 승보사찰(僧寶寺刹)의 근본도량으로서, 한국불교와 역사를 함께해온 유서깊은 고찰이다. 이곳은 신라 말 혜린(慧璘) 스님이 창건한 후 고려시대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스님이 주석하며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을 일으킨 곳이자 열여섯 분의 국사를 배출한 도량으로, 현대의 법정스님에 이르기까지 고승들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불교에서는 부처(佛)와 부처의 가르침(法)과 그 가르침에 따라 깨달음을 구하는 승려(僧)를 세 가지 보물이라 하여 삼보(三寶)라 일컫는데, 송광사가 승보종찰이라 불리는 까닭은 보조국사 이후 불교개혁을 위한 결사운동과 이를 실천하는 참선수행의 전통을 확립하여 수많은 국사와 대선사들을 배출해왔기 때문이다. 또한 참선수행을 위한 선원(禪院)과 경전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교육기관인 율원(律院)을 모두 갖추고 있는 총림(叢林)으로서, 해인사ㆍ통도사ㆍ수덕사ㆍ백양사와 함께 5대 총림 중 하나인 조계총림의 위상을 지니고 있다.

[송광사 입구에 자리한 송광사 안내도...]
사적(寺蹟)에 의하면 송광사는 고려 명종 때 이미 80여 동의 건물을 가진 대사찰이었고, 6.25로 소실되기 전만 하여도 건물 총수가 80여 동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약 50여 동의 건물로 중건 불사하여 그 사격을 유지하고 있다. 송광사는 조계산 줄기를 뒤로 두고 서향하여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데, 이러한 가람배치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형태이다. 이는 산자락이 열려 있는 서쪽을 향해야 앞이 트이고, 조계천의 물줄기를 절 앞에 둔 채 남북으로 뻗은 산줄기가 좌청룡 우백호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지형 탓으로 여겨진다. 땅의 모양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풍수지리적 조건을 적절하게 수용한 결과인 것이다.

[송광사 매표소...]

[송광사 매표소 안쪽 금강역사 같은...]

[송광사 오르는 계곡에 (청량각)극락교가 멋지게 맞이해주고...]
1천2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승보종찰 송광사에는 고려시대 16국사를 상징한 16암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16암자는 보조국사가 창건한 보조암(普照庵:일명 本庵)을 비롯하여 은적암(隱寂庵:東庵)ㆍ광원암(廣遠庵:西庵)ㆍ묘적암(妙寂庵:南庵)ㆍ북암(北庵)과, 천자암(天子庵)ㆍ청진암(淸眞庵)ㆍ자정암(慈靜庵:佛日庵)ㆍ감로암(甘露庵)ㆍ부도암(浮屠庵)ㆍ조계암(曹溪庵)ㆍ판와암(板瓦庵)ㆍ실상암(實相庵)ㆍ상선암(上禪庵)ㆍ상염불암(上念佛庵)ㆍ하염불암(下念佛庵) 등을 말한다. ▶▷≫

[새로 만들어진 멋진 승천교가...]
그러나 현존하는 암자는 광원암ㆍ천자암ㆍ감로암ㆍ부도암ㆍ자정암(현 佛日庵)ㆍ판와암(현 印月庵) 등 여섯 암자뿐이며, 근래에 건립한 오도암(悟道庵)과 탑전,적광전(塔殿, 寂光殿)이 있다. 이 외 수석정 부근에는 1940년에 효봉(曉峰) 스님이 창건한 목우암(牧牛庵)과 1975년 구산(九山)스님이 조계산과 연산봉 사이에 초암을 지어 정진한 인월정사(印月精舍)가 있고, 절 입구인 외송(外松) 마을 뒷산에 있었다는 빈대절과 이름 모를 암자 터가 6개 이상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계곡을 오르다 보면 요즘 건립한 오도암과 탑전을 처음 만나게 된다.

[오도암(悟道庵)을 들어서려면 허리를 굽히고 구산선문으로 들어서야...]

[오도암(悟道庵) 적광전(寂光殿)...]
이곳은 1969년 송광사에 조계총림이 개설될 당시 방장(方丈)으로 주석한 구산수련(九山秀蓮: 1909∼1983) 스님의 다비장(茶毘葬) 터로, 제자인 현호(玄虎) 스님이 유촉을 받들어 송광사 제8차 중창불사(1983~1991) 때 건립한 건물구역이다. 탑전(塔殿)이라고도 불리는 이 구역은 1991년에 세운 스님의 사리탑인 적광탑(寂光塔)과 비(碑)를 중심으로, 이를 수호하고 향화를 올릴 적광전(寂光殿), 요사채인 2층 누각형태의 무상각(無上閣), 문간인 구산선문(九山禪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적광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주심포계 팔작건물로, 높은 가구식 기단 위에 건립되어 있다. 어칸에는 흑지에 백서로 양각된 편액 ‘寂光殿’과 그 측벽에 ‘石林精舍’ㆍ‘牧雨家風’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오도암 적광전 안에는...]

[오도암(悟道庵) 탑전(塔殿)...]

[오도암 석등...]

[오도암 적광탑: 1991년에 세운 구산스님의 사리탑인 적광탑(寂光塔)...]

[오도암 전경...]

[오도암 뒷곁에 자리한 천연기념물인 이팝나무...]

[오도암(悟道庵) 부도전...]

[구산대사의 뜻이 담긴 구산선문으로...]

[부처님 오신날을 경축하는 등들이 연못을 가로질러...]

[연등 뒤로는 송광사 부도전이...]

[송광사 일주문...]
청량각을 지나 울창한 숲 사이로 난 평탄한 흙길을 오르면, 절의 입구인 일주문에 닿게 된다. 전면 1칸의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된 조선 후기의 건물로, ‘조계문’이라고도 부른다. 흰눈긋기한 아담한 돌담 벽체 사이에 자리하며, 여러 층의 다포가 화려하게 장엄되어 있다. 송광사 일주문은 편액을 가로로 달지 않고 창방과 평방의 중앙에 종서로 쓴 점이 다소 특이하다. 정면 중앙에 대승선종(大乘禪宗), 우측에 조계산(曹溪山), 좌측에 송광사(松廣寺)라고 나란히 3열로 썼으며, 뒷면에는 승보종찰조계총림(僧寶宗刹曹溪叢林)이라 적었다. ▶▷≫

[조계산(曹溪山) 대승선종(大乘禪宗) 송광사(松廣寺)라 쓴 현판이 걸린 일주문...]
초입에서부터 선종사찰로서 송광사의 종풍과, 삼보 사찰 중 승보종찰(僧寶宗刹)로서의 격을 살필 수 있다. 경내와 많이 떨어져 있어 전란과 화재를 피해간 듯 조선 후기의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그 옆에는 송광사 중창의 공덕 주과 신도비가 봉안된 비림(碑林)이 있다. 한참을 걸어 들어오느라 송광사 사찰을 찾는 것조차 잃어 비릴 즈음 나타난 조계산 송광사라고 적힌 일주문은 별안간 해이해진 마음을 움츠리게 해준다. 아 이제 정말 사찰에 도착했고 정진하는 마음으로 임해야겠다는 그런 생각이 드는 그런 일주문이다.

[승보종찰 조계총림(僧寶宗刹曹溪叢林)이라 쓰인 편액이...]

[송광사 임경당(臨鏡堂)과 개울위 우화각(羽化閣)...]
송광사를 생각하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래도 처음 딱히 떠오르는 사진을 생각하면 우화각 아래로 보이는 이 개울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우화각 끝에 드나들 게 마련해 놓은 징검다리 또한 송광사를 생각해가 해주는 그런 이미지 들이다. 아침 저녁으로 찾아도 이곳은 역광이라 멋진 사진을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송광사를 찾은 이들은 아마 이곳을 빼놓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도 역시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하래 하며 몇장의 사진을 찍으려 갖은 폼을 다 잡은 것 같다. 그래도 역시 멋진 포인트라 생각은 여전하다.

[송광사 임경당(臨鏡堂)과 개울위 우화각(羽化閣)...]
우화각은 홍교위에 세운 일종의 문루형식으로 18세기 전반의 건물이라고 볼 수 있다. 우화각이 또한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 초입에 있다는 것은 아마도 사찰의 앞으로 흐르는 청계수의 뜻에 따른 것으로 보여진다. 앞에서 보면 누각이지만 옆에서 보면 다리역할을 하는 그련 루교 건축물로서 특이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 다리를 능허교(凌虛橋)라고도 부른다. 항상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은 밑을 흐르고 있는 청계수의 덕이 아닐까 생각한다. 위쪽의 우화각도 아름답지만 청계수에 비친 다리가 더욱 아름답게만 보인다.

[좌측엔 세월각(洗月閣)'달을씻는곳'이 우측엔 척주각(滌珠閣)'구슬을 씻는곳'이...]
일주문을 지나서 계류를 따라가면, 경내로 진입하기 위한 홍교(虹橋)를 건너기 전에 척주당(滌珠堂)과 세월각(洗月閣)이라는 편액을 가진 신비하고 작은 두 채의 건물이 나란히 서 있다.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송광사만의 독특한 건물로서, 이곳은 천도재(薦度齋)를 지내기 위해 절에 오르는 영혼을 깨끗이 목욕시키는 곳이다. 따라서 이곳에서 남자의 영혼은 척주각에, 여자의 영혼은 세월각에 모시고 속세의 부정한 때를 벗는 관욕의식을 치른 후 청정한 불법도량으로 들어가게 된다. 남자는 ‘구슬을 씻는다’는 뜻의 척주(滌珠), ▶▷≫

[세월각(洗月閣)과 우측에 척주당(滌珠堂)엔 위패들이 모셔져 있고...]
여자의 혼은 ‘달에 씻는다’는 뜻의 세월(洗月)이다. 두 건물 모두 정면 1칸, 측면 1칸의 목조 맞배건물로, 전면에 세살로 단장한 2분합의 창호를 가설하고, 3면은 벽체로 마감한 감실 모양의 형태이다. 이들 건물은 여느 사찰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형태로, 사찰이 담당하고 있는 종교적 기능을 가람의 건축적 구성을 통해 형상화시키고 있다. 이들 관욕소 좌측에는 조계종주(曹溪宗主) 제1세인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스스로의 불멸을 입증하기 위해 심었던 고향수(枯香樹)가 봉안되어 있어, 보조국사가 다시 송광사를 찾을 때 소생하리라는 예언을 증명이라도 하듯 고고하게 서 있다.

[송광사 亞자형 가람 배치도...]

[우화각(羽化閣)을 정면에서 보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9호이며 일명 능허교(凌虛橋)라고도 불린다. 이 홍교는 다리 구실도 하고 우화각(羽化閣)이라는 건물을 세워 사람의 통행을 돕는 이중효과 도 나타내고 있다. <송광사성공중창록>에 의하면 이 홍교는 1700년에서 1711년 사이에 조영된 것으로 60여년이 지난 1774년(영조 50)에 중수하였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계곡을 이용하여 19개의 4각 장대석을 각지에 맞춰 홍예형을 이루고 양쪽 측면으로는 막돌이 아닌 4각 판석을 쌓아올렸다. 또 난간 받침돌과 돌출된 중심돌 위에 4개의 긴돌을 연결하여 난간을 이루었고 홍예천장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돌이 나와 있다.

[임경당(臨鏡堂)'거울 같은 물가에 있는 집' 건물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성보각 맞은편에 위치한 'ㅁ'자형 요사채 건물로, 2층의 맞배건물 6동이 회랑처럼 연결되어 있는 대방(大房) 형식의 건물이다. 1797년에 건립되었으며, 다른 승당(僧堂)이 대웅전 좌우에 들어선 것과는 달리 입구인 우화각 옆에 자리하고 있다. 건물의 전면은 계곡과 맞닿은 'ㅗ'자형의 정자(亭子) 모습으로, 1층은 막돌을 석회줄눈으로 층을 맞춘 담장으로 장식하고, 상부에 팔작지붕의 정자를 올려놓은 형태이다. 정자는 전면에 걸린 양각된 편액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육감정(六鑑亭)또는 삼청선각(三淸僊角)이라 불리며, 우화각ㆍ침계루 등과 함께 송광사 가람의 훌륭한 경관으로 손꼽히고 있다.

[우화각에서 본 사자루와 맑은 청계수...]
천왕문의 남쪽에 위치한 사자루는 전면 7칸, 측면 4칸의 중층 누각건물로서 일명 침계루(枕溪樓)라고도 한다. 1층 전면 툇간을 계류의 바위 위에 누주를 두어 건물을 받치도록 하였다. 누상(樓上)은 기둥 사이를 막아 폐쇄하였으며, 폐쇄된 벽체는 머름드린 판벽에 중앙 창얼굴을 만들고 널빤지로 문짝을 만들어 다는 바라지창을 가설하였다. 재(齋)가 있을 때 영혼의 대기장소나 여름철의 학습공간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근래에는 승려들이 이곳에서 목련극(木蓮劇)ㆍ팔상극(八相劇) 등을 공연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내부에 금동비로자나불상과 화엄53선지식탱(華嚴53禪知識幀)을 봉안한 강당으로서, 선원의 보조건물로 이용되고 있다.

[사자루 측면이 아주 고풍스러움이 보이고...]

[송광사 천왕문...]
우화각과 맞닿아 있는 천왕문은 1609년에 건립된 조선후기의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1628년(인조 6)에 건립한 후 1718년(숙종 44)에 중수하고 이듬해에 내부 사천왕상을 중수하였으며, 1806년(순조 6)에 다시 사천왕상을 중수ㆍ보수하였다. 건물 내부에는 동서남북 네 방향을 주재하며 불법을 호위하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봉안되어 있다. 이들 천왕상은 소조상(塑造像)으로 1628년에 조성되었으며,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자 육중하고 위압적인 몸짓과 표정을 짓고 있지만 과장된 표정에서 오히려 친근함이 느껴진다.

[천왕문 내부 보수공사로 이렇게 살짝만...]
가는날이 장날이라더니 오늘은 그 반대로 송광사 천왕님들을 못뵙는 날이다. 천왕문 입구를 다 막아놓고 천왕님들은 칠을 뒤집어 쓰고 보수공사에 한창인 것 같다. 다행이 왼편의 비파를 들고 계신 지국청왕을 살짝 뵐 수가 있었다. 역시 지국천왕의 미소는 살짜기 보인다.천왕1609년(광해군 1)에 건립된 사천왕문 내부에 사찰을 외호하듯 서 있는 사천왕상이 있다. 사중(寺中) 기록에 의하면 사천왕문의 초창 후 1628년에 조성되어, 1719년에 천왕상을 개채ㆍ중수하였으며, 1806년에 다시 사천왕상을 중수ㆍ보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붕화상(漢朋和尙)이란 문구가 있는 감로수 터...]

[종고루 밑에서 올려다 본 대웅보전...]
오늘은 순천 송광사 ‘제798주기 불일보조국사 종재식이 오전 10시부터 국사전에서 거행된다고 했다. 그러나 대웅보전앞에는 수많은 불자들이 불회에 참가하고 있고 마당으로 올라서니 사방군데 각 건물앞마다 꼭곡 들어찬 신도들이 같은 띠를 둘른 옷을 입고 늘어서 있다. 조용히 할머님 불자님께 슬쩍 엿주어 보니 불보살 불사라고 하신다. 알아듯지는 못하였지만 늘어선 불자들이 전부 여성분인 것으로 보아 보살이 되는 보살식인 것 같다. 아마도 기독교에서 세례식 같은 것으로 인식을 했는데 잘은 모르겠다.

[법성료의 솟을 지붕 창문이 ...]
송광사의 매력 중의 하나를 찾아보려면 법성료와 하사전의 솟을 지붕을 보라고 했던가? 정말 특이하게 솟아있는 창을 볼 수가 있다. 아름다움을 간직한 조형미 보다는 의아함을 자아내게 해주는 솟을 창은 환풍 구의 기능을 넘어서 무엇인가 의미해주는 게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생각이 들 게 해준다. 그래서 인지 하사당의 앞 쪽에는 기와 불사의 흔적이 산을 이룬다. 들어갈 수는 없게 되어있는 요사이지만 더욱 궁금해지기만 해 요즘 흔히 행해지는 UCC같이 내부를 찍어 올리시는 스님은 언제나 나오시려나....

[다들 마음만은 대웅보전으로 향하고...]

[송광사 대웅보전...]
종고루를 지나 중정(中庭)으로 들어서면, 송광사의 중심전각이자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아자형(亞字形) 대웅보전이 정면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대웅전은 신라 때부터 있어왔으나 수차례의 소실과 중건을 거친 후 8차 중창시에 원형 그대로 중정 북쪽에 옮겨 짓고 승보전(僧寶殿)이라 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988년 대웅전 자리에 규모를 넓혀 신축하면서 그 명칭도 대웅보전이라 칭하게 되었다. 약 108평의 크기에 정면 7칸 측면 5칸의 아(亞)자형 구조로, 평면은 원각사(圓覺寺) 13층 석탑의 평면과 유사하게 설계된 현대 목조건물이다. 건물 외관은 정연한 가구식 기단 위에 연화초석을 얹고 그 위에 원주형 기둥을 세웠다. 외3출목, 내4출목의 화려한 다포식 공포를 조합하여 평면이 아자형(亞字形)을 이루는 팔작지붕을 도안해 내고 있다.

[송광사 지장전...]
3단의 높은 축대 위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로서, 원형주초 위에 배흘림기둥을 얹고 1출목의 주심포와 그 사이에 화반을 둔 일반적인 맞배건물의 모습이다. 건물 전면은 2ㆍ4분합의 빗살문을 창호로 가설하고 전면을 제외한 3면을 판벽으로 처리한 특이한 모습이다. 3면에는 반야용선도(般若龍船圖)를 비롯하여 인로왕보살도(引路王菩薩圖)ㆍ동자도(童子圖) 등 수많은 불교 소재의 벽화들이 단청되어 있다. 내부는 고주 없이 5량의 가구로 처리하여 넓은 장방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ㄷ'자형 불단 위에는 목조지장보살좌상을 주존으로 하여, 그 좌우에 도명존자ㆍ무독귀왕ㆍ저승의 시왕(十王) 등 명부 권속들이 협시해 있다. 후불탱으로는 1987년 금어 조연우(曺延宇)가 그린 지장탱을 비롯하여 1963년 일섭(日燮) 스님이 그린 시왕탱ㆍ사장탱이 봉안되어 있다. 상단 좌측에 영단이 설치되어 있어, 돌아가신 이의 천도를 위한 모든 재식(齋式)은 이곳에서 거행되고 있다.

[송광사 승보전...]
승보전은 승보사찰 송광사의 상징적 건물로, 6.25 이후 중창된 대웅전을 옮겨 지은 건물이다. 초창 당시의 모습은 알 길이 없고, 7차 중창시인 1961년에 주지 금당화상(錦堂和尙)이 중창한 후 1988년의 8차 중창 이전까지 옛 대웅전으로 사용되었으며, 지금의 대웅보전을 지으면서 원형 그대로 현재의 위치에 옮겨 짓고 승보전이라 하였다. 건물 외부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건물로, 민흘림기둥 위에 외3출목과 내4출목의 다포를 올린 웅장한 모습이다. 전면에 빗살로 단장한 4분합의 창호를 가설하고,
3면의 외벽에는 심우도를 단청하여 송광사의 '목우가풍(牧牛家風)’을 회화적으로 표현하였다. 건물 내부는 무고주 5량 가구와 정방형의 계단식 불단을 가설하여 석가모니부처님과 10대 제자, 16나한 및 1천250비구 제자상을 봉안하여 석가모니의 영산회상(靈山會上)을 재현하고 있다. 역사적 가치는 크지 않지만 이름에서도 살필 수 있듯이 승보사찰의 종지를 이은 송광사의 상징적 건물로서, 법당의 격식을 잘 갖춘 현대 목조건물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송광사 대웅보전앞의 보살집회중인 많은 불자들...]
승보전 우측에 자리한 성보각은 송광사의 박물관으로 1988년에 중창되었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목조 누각형의 중층 건물로, 초익공 양식의 우진각지붕을 갖추고 있다. 철근 콘크리트로 된 1층은 유물보존창고와 기계실로 구성되어 있고, 약 70여 평에 달하는 2층은 유물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성보관 내부에는 목조삼존불감(木彫三尊佛龕:국보 제42호)ㆍ고려고종제서(高麗高宗制書:국보 제43호) 등 국보 2점과, 대반열반경소(大般涅槃經疏:보물 제90호)ㆍ경질(經帙: 보물 제134호)ㆍ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삼현원찬과문 ▶▷≫

[송광사 성보박물관...]
(妙法蓮華經觀世音菩薩普門品三玄圓贊科文:보물 제204호)ㆍ경패(經牌:보물 제175호)ㆍ금동요령(金銅搖鈴:보물 제179호),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大乘阿毘達磨雜集論疏:보물 제205호)ㆍ묘법연화경찬술(妙法蓮華經讚述:보물 제206호)ㆍ금강반야경소개현초(金剛般若經疏開玄褻:보물 제207호)ㆍ노비첩(奴婢帖) 및 수선사형지기(修禪社形止記:보물 제572호) 및 보물 제572호롤 일괄 지정된 고려문서(高麗文書)ㆍ노비첩(奴婢帖)ㆍ수선사형지기(修禪社形止記) 등 9점의 보물을 비롯하여 수많은 송광사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

[송광사 선원...]
이 밖에도 자정국사사리함(慈靜國師舍利函: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8호)ㆍ능견난사(能見難思: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9호)ㆍ금강저(金剛杵: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2호)ㆍ고봉국사 주자원불(高峰國師廚子願佛: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8호)ㆍ팔사파문자(八思巴文字: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30호) 등 지방 유형문화재 5점과, 영조(英祖)의 어필(御筆), 추사(秋史)의 서첩(書帖), 대원군의 난초 족자 등 총 6천여 점의 불교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어 한국의 대표적인 불교전문박물관으로 각광받고 있다. 사진촬영이 절대 금지되어있는 지역이다.

[송광사의 국제선원구역의 이층구조인 중현당...]
송광사의 국제선원구역(國際禪院區域)으로, 선원과 불일국제선원의 선(禪) 수행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 구역은 성적문(惺寂門)을 통해 출입하며, 건물은 대지전과 중현당을 합하여 문수전(文殊殿)이라 부른다. 효봉스님의 법을 이은 구산스님이 송광사에 조계총림을 개설하고 목우가풍을 선양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면서, 불일국제선원(佛日國際禪院)을 열어 한국 선을 국제화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스님의 이러한 유지를 받들기 위해 전국적 신도조직인 불일회(佛日會)가 개설되어 국제선원과 함께 그 선맥을 이어가고 있다.
중현당은 2층의 목조건물로 1층은 정면 8칸 측면 3칸이며, 2층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맞배건물이다. 대지전은 정면 6칸 측면 5칸의 ㄷ자형 중층 누각건물로 염화실(拈花室)이라고도 불리며, 1층에는 선원에서 필요한 생필품들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고, 2층은 선방으로서 대방의 구실을 하고 있다. 도성당과 함께 송광사의 국제선원구역으로 구분되며, 기와로 엮은 흙담이 선원의 경계 구역을 표시해준다.

[송광사 관음전...]
대웅전 우측 상단에 자리한 관음전은 1903년에 성수전(聖壽殿)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으며, 1955년에 관음전으로 바뀌었다. 설립 당시는 1902년 고종황제의 성수망육(51세)을 맞아 사액(賜額)된 황실 기도처의 역할을 하였다. 다듬어진 3단의 축대 위에 세워진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건물로서, 막돌초석 위로 배흘림기둥을 세우고 다포양식의 공포를 얹은 화려한 모습이다. 건물 외관은 빗살로 단장된 4분합의 창호와 중앙 석축 앞 거북모양의 계단석이 특이하며, 3면의 건물 외벽에는 고종황제의 축수를 기원하듯 십장생(十長生)을 도안한 화려한 단청이 장엄되어 있다. 인파에 밀려 관음전 석계단을 찍지 못했다.

[관음전 우측 응향각 뒤로는 솟을 지붕으로 유명한 하사당이 있지만 들어갈 수가 ...]
대웅보전 좌측에 위치한 정면 4칸 측면 3칸의 맞배건물로, 법당을 관리하는 노전스님의 거처이다. 구조는 흙을 판축한 인공축대 위에 정원을 조성하고, 막돌초석과 두리기둥을 세워 2출목의 공포를 얹은 주심포계 건물 모습이다. 건물 외부는 어칸에 2분합의 빗살창호를 가설하고 2칸 툇마루를 놓아 실용적인 요사채의 구조를 갖추었고, 협칸에는 소형 빗살창호를 가설하여 전후 4개의 방사를 가진다.

[승보전 뒷뜰에서 본 대웅보전 측면...]

[독특한 형식의 송광사 대웅보전...]

[송광사 승보전...]

[승보전 내부에 모셔진...]

[승보전 좌측면에 전시된 비사리 구시...]
전엔 천왕문 옆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겨져 있다. ‘비사리구시’는 쌀 일곱 가마에 해당하는 약 4천명분의 밥을 담아 저장할 수 있는 목조용기(木造容器)이다. 그 크기에서 보는 이들을 압도하고 있는데, 1724년 전라북도 남원시 송동면 세전골에 있던 싸리나무가 태풍으로 쓰러지자 이를 가져와 만든 것이다. 조선 영조 이후 절에서 국재(國齋)를 모실 때 사찰로 모여든 대중들을 위해 밥을 저장했던 일종의 밥통이다. 보조국사와 당나라의 담당국사가 나란히 꽂은 지팡이가 살아서 자란 것이라는 전설을 간직한 ‘쌍향수(雙香樹), 어느 순서로 포개어도 크기가 오묘하게 딱 들어맞는다는 바루 세트인 ‘능견난사(能見難思)’와 함께 송광사의 이른바 ‘3대 명물’ 중 하나로 칭해지고 있다.

[승보전 건물기둥의 단청은 눈을 못떼게 하고...]

[송광사 종고루(鐘鼓樓)...]
천왕문을 지나 송광사 경내로 들어서는 초입에 자리한 종고루(鐘鼓樓)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맞배지붕의 누각이다. 원래 해탈문(解脫門)이 있던 자리에다 1961년에 종고루를 중건하였다. 누하식(樓下式) 구조로 1층 어칸의 통로를 따라 출입할 수 있으며, 2층은 사면이 트인 난간식의 누(樓) 형태로 내부에는 범종(梵鐘)ㆍ운판(雲板)ㆍ목어(木魚)ㆍ법고(法鼓) 등 불전사물(佛前四物)이 봉안되어 있어 조석예불 전에 불음(佛音)을 울리는 곳이기도 하다. 종고루 좌측으로 살짝 법륜료의 솟을지붕이 조금 보인다.

[정혜사(定慧社) 입구...]
송광사의 큰방이자 강원의 중심건물로서, 발우공양과 대중공사가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이중기단 위에 정면 10칸 측면 2칸의 팔작건물이 자리하며, 전후 1칸의 마루와 별실이 덧붙여 있다. 안상형으로 투각된 삼문을 따라 출입하며, 내부에는 큰방인 정혜사를 비롯하여 해청당ㆍ공루 등 강원의 부속건물이 체계적인 가람구조 속에 배치되어 있다. 이쪽은 아주 한적한 것이 또다른 송광사의 맛을 느길 수 있는 그런 곳이기도 하다.

[수선사 뒤로 선방들이 즐비한...]

[선방앞엔 역대대사들의 영정이...]

[스님들의 수행처인 수선사와 설법전입구 진여문...]
대웅전 뒤편 석축 위에 자리한 건물은 대개 선(禪)을 행하는 수선도량(修禪道場)으로, 설법전 오른쪽에 자리잡은 수선사는 설법전 등과 함께 이러한 목적에 의해 조성된 송광사의 대표적 건물이다. 수선사(修禪社)라는 이름은 보조국사가 길상사를 중창하면서 새롭게 바꾼 사찰명으로, 당시에는 방장(方丈)이라 하여 보조스님의 처소로 사용하였다. 이후 조선 말기에 해은대사(海隱大師)가 33조사의 영정을 도서실로 쓰던 대장전으로 이안하고, 부휴스님의 영정을 수선사에 봉안한 후 조사전(祖師殿)으로 사용하였으나, 1951년의 화재로 모두 ▶▷≫

[진여문이 굳게 닫혀있음을 증명이나 하듯이...]
소실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69년에 세워진 것으로, 정면 6칸 측면 4칸의 단층 맞배건물이다. 외부는 매 칸마다 세살의 2분합 창호와 측면 전후에 툇마루를 각각 1칸씩 가설하고, 어칸 상부에는 경봉(鏡峰) 스님이 쓴 '修禪社' 편액과 주련 4기가 걸려 있다. 내부는 선방으로서 커다란 둥근 거울을 봉안하여 ‘자신을 비춰보라’는 의미를 무언으로 전하고 있다. 송광사 내의 명실상부한 수도처로서 이곳에는 약 25명의 선객이 상주하고 있다. 국사전ㆍ설법전을 비롯한 이곳 선원구역은 외인의 출입을 일체 금하고 있으며, 차분한 선실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송광사 영산전과 우측엔 약사전 뒤 쪽에서...]

[송광사 약사전(보물 제 302호)...]
송광사 경내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전각이지만, 1974년 중수시에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1631년(인조 9)과 1751년(영조 27)에 각각 중건된 역사를 지닌 유서깊은 건물이다. 정면과 측면이 모두 1칸이며, 대들보가 없이 포만으로 지붕을 구성한 특이한 구조로 팔작지붕을 형성하고 있다. 이처럼 건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특성을 지니고 있어 현재 보물 제302호로 지정되어 있다. 내부에는 중생의 질병과 고통을 치유하는 약사여래(藥師如來)를 봉안하였으며, 후불탱화로는 1904년에 조성된 석가모니후불탱을 모셨다.

[송광사 영산전(보물 제 303호)...]
약사전과 나란히 서 있는 영산전은 일명 팔상전(八相殿)이라 하며, 1793년에 건립된 조선후기 양식의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팔작건물로서 전체적으로 약사전과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보물 제303호로 지정되어 있다. 3출목의 다포가 비교적 큰 팔작지붕을 지탱하고 있으며, 처마 밑의 다포식 공포는 세부가 조선 초기의 성격을 띤 힘찬 모양으로 조각되어, 간결하고 단아한 멋을 느낄 수 있다. 내부에는 1780년에 조성된 목조석가여래좌상을 봉안하였고, 후불탱화로는 보물 제1268호로 지정된 1725년 조성의 석가모니후불탱과 팔상탱이 있었으나 현재 성보각에 별도로 보관중이며, 현재 사진으로 봉안된 팔상탱이 모셔져 있다.

[영광루(靈光樓)라는 현판이 달린 선원...]

[송강사 해우소 옆 연못을 열심히 들여다 보는 학생들...]

[송광사 해우소...]

[청계수 개울에 마련된 징검다리 위로 학생글이...]

[계곡 주변에 아름다운 민들레가...]

[송광사 약수터...]

[송광사 극락교인 청량각(淸凉閣)의 뒷면...]

[송강사 극락교인 청량각(淸凉閣)...]
송광사의 넓은 주차장과 즐비한 가게ㆍ식당을 지나 산길을 오르면, 계곡의 흐르는 물 위로 석조다리인 극락홍교(極樂虹橋)가 놓여 있고, 그 위에 누교(樓橋)인 청량각이 세워져 있다. 청량각은 천년가람 송광사가 자리한 조계산의 맑은 계곡이 동구에서 굽이치는 지점에 자리한 풍취 있는 건물로, 속세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으라는 듯 속세와 불계(佛界)의 경계지점에 자리한다. 정면 1칸 측면 4칸의 팔작건물로, 문이나 벽체 없이 기둥만을 나타냈으며 조선 후기에 세워졌다가 1921년과 1972년에 각각 중수하였다. 건물 앞뒤로는 1921년 쓴 청량각(淸凉閣)이라는 편액과, 1917년 쓴 극락교(極樂橋)라는 2기의 편액이 각각 걸려 있다. 극락홍교는 1730년에 조성된 것이다.

[극락교 천장에 황룡이...]

[극락교 천장에 청룡은 여의주를 물고...]

[송광사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하시는 스님...]
오늘따라 사찰의 커다란 행사 여러 가지가 같이 이루어진 날이기에 인파도 많지만 평상시 공개하던 건물들도 모두 비공개로 하고 선원 쪽엔 얼씬도 못하게 하는 바람에 조금은 아쉬운 발걸음을 한 곳이 너무도 많다. 그러나 역시 삼대사찰의 한군데로서 손색없는 곳을 돌아 나오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이제 남도 쪽으로 떠나는 김에 고흥 능가사로 발길을 옮겨 본다. -<끝>-
출처 : 도시애들의 여행 보따리
글쓴이 : 도시애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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