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적지종류 : 사찰

관련사찰: 수종사(水鍾寺)

설화종류 : 사찰전설

시대 : 연대미상
<요약>수종사의 유래
<내용>526호 7면
설화와 전설 수종사
임금님의 행렬이 도착한 것은 해거름 때였다. 오대산을 다녀 오는 임금(세조)의 행차가 한양 대궐까지의 백리길을 앞두고 하루 저녁 묵어갈 행궁을 마련한 곳은 양수리. 임금은 전국 명산대찰을 즐겨 찾았다. 치국의 이념이 유가의 가르침에 있었을지라도 임금은 큰 절을 찾아 경치를 즐기고 부처님께 예를 올리기를 마지 않았다.
보위에 오른 어린조카(단종)의 치국 원년에 거사(계유정란)를 일으켜 왕좌에 앉았고 조카는 노산군으로 강등 시키고 영월땅으로 유배 보냈다가 마침내 비명횡사를 시킨 지난날. 그 광풍같은 세월에 자신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선비와 무장의 수가 헤아릴 수 없으니 보위에 오르기까지의 험한 행로가 국가경영과 신왕권 체제정비의 고단한 시간 속에서도 문득문득 폐부를 찌르고 있음을 눈치빠른 신하들은 모를리 없었다. 대군시절, 부왕(세종)의 명을 받들어 궁정안에 불당을 설치했고 승려 신미(信眉)의 아우뻘 되는 김수온과 더불어 불서(佛書)의 번역을 감장하기도 했던 임금이 아닌가. 거기에 음악에 대한 조예도 남달라 풍류의 기질을 갖추었으되 강직한 눈빛의 이채로운 조화를 지니고 있는 임금의 심사를 헤아리는 신하들은 즐겨 명산대찰을 소개했고 임금 역시 짬이 나는대로 단촐한 행렬을 갖추어 유람길에 오르곤 했던 것이다.
임금의 행렬은 그리 화려하지 않았으되 위엄이 당당했고 행궁 주위에서는 찬바람이 이는 듯했다. 이곳에 임금이 머무는 가장 큰 이유는 한수(漢水)의 절경을 즐기고자 함이었다. 저 금강산 어름에서 발원하여 금강, 수임, 화천, 춘천, 가평, 홍천, 조종천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백두대간의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북한강의 2천리 장정. 강원도 삼척 대덕산에서 첫 물길을 일으켜 평창, 주천강의 세력을 합해 남류하다가 단양에서 북서로 길을 돌려 달천, 섬강, 청미천, 흑천을 거치며 조선땅의 허리를 씻어 온 남한강. 그 두 강의 호호탕탕한 위세가 한곳으로 모여드는 곳에 임금의 행렬이 하루밤을 쉬어가고자 했다. 푸른 버드나무 줄기가 바람부는대로 휘청대는 강변으로 붉은 노을이 비껴드는 시각. 임금은 여행의 피로도 모르고 강가 풍경을 조망하고 있었다.
풀벌레 애잔한 울음소리를 따라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침상에 들었던 임금이 벌떡 일어나야 했다. 귀에 청아한 종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좋은 종소리로다. 이 근처에 큰 절이 있음이야. 그런데 어찌하여 대신들은 절이 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을꼬...."
임금은 종소리가 강 건너 산 중허리에서 들려오고 있음을 알았고 그 청아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감상하며 잠이 들었다.
"이 근처에 큰 절이 있는 듯 한데 어떤 절이 있더냐?"
이른 아침 임금이 기침하여 물었으되 대답하는 신하는 없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근처에 절이 있는 것을 모른다면 어제 밤에 들린 종소리는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
신하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전하, 이곳 인근에 종소리가 들릴만한 절은 없삽고 지난밤에 종소리는 들리지 않았나이다."
"내가 헛것을 들었을까. 그럴리가 없다. 이는 분명 부처님이 어떤 계시를 내리심이로다."
여기에까지 생각이 다다른 임금은 바로 신하들에게 강 건너 산을 조사 하도록 했다. "분명 절이 있거나 절터라도 있을 것이다. 특별히 종이나 파편이 있으면 반드시 보고하라. 어떤 기이한 형상이 있으면 손대지 말고 그대로 두도록 하라."는 단서와 함께.
한 나절만에 돌아 온 군사들과 대신들은 이미 강을 건너 자리를 잡고 기다리는 왕에게 뜻밖의 소식을 가져왔다. 그 산은 운길산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고 산 정상 가까이에서 그리 깊지 않은 암굴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암굴앞은 절터의 흔적이 완연하나 폐허가 되어 이렇다 할 유물이 없는데 다만 암굴에 열여덟 분의 나한님들이 가지런히 조성되어 있는데 그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신하들이 군사를 데리고 암굴앞에 이르니 18나한상 앞쪽의 암굴 천정에서 물방울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지는데 그 소리가 큰절에서 듣는 아름다운 범종소리와 흡사하다는 보고였다.
"바로 그곳이다. 그 소리가 내 귀에만 들렸음이니 분명 나한님들의 조화라 할 것이다. 내 그곳에 참배하지 않을 수 없으니 길을 잡도록 하라."
암굴에 도착한 임금은 나한님들을 보고 경탄의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신묘한 조화로 자신을 이곳까지 오게 한 그 위신력에 감복하며 경건하게 절을 올렸다. 아라한을 살적(殺賊)이라 부르는 것은 수행의 적이 되는 모든 번뇌를 물리치고 항복 받은 것을 뜻하며, 응공(應供)이라 부르는 것은 모든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받을 위치에 올랐음을 뜻하는 것이다. 또 진리에 상응하는 분이라는 뜻에서 응진(應眞)이라 불리기도 했다.
천안명(天眼明), 숙명명(宿命明), 누진명(漏盡明)의 삼명(三明)과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 신족통(神足通), 숙명통(宿命通), 누진통(漏盡通)의 육신통(六神通)에 8해탈법(八解脫法)을 모두 갖추어 인간과 천상인의 소원을 두루 성취시켜 주는 복전(福田)이라하여 일찍부터 존경과 숭앙의 대상이 되어 왔던 나한님들. 16나한 18나한 5백나한으로 그 수를 헤아리기도 하는 나한님들은 많은 절의 응진전이나 나한전, 영산전에 모셔져 왔던 것이다. 뿐만아니라 고려조를 비롯해 역대 왕들도 나한재를 베풀어 국가의 안녕과 백성의 평안을 기원했다는 기록이 적잖게 전하고 있는 터였다. 조선조를 개국한 태조대왕도 왕이되기전 이상한 꿈을 꾸고 안변 설봉산 토굴에서 도를 닦고 있던 무학(無學)대사에게 해몽을 부탁하니 "큰 길조이니 나한전을 세우고 5백나한상을 조성해 봉안하고 5백일 동안 기도하라"고 해 함경도 길주 광적사에 오백나한이 모셔졌던 일도 있었다.
이제 임금의 귀에 신묘한 종소리를 듣게 하여 한양 궁궐행을 하루 미루고 임금과 신하들을 운길산으로 오르게 한 이 18나한님들의 신통 앞에 임금과 신하들이 경배하고 있는 참이었다. 참배를 마치고 암굴 앞에 서서 산아래를 둘러본 임금은 다시한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앞에 펼쳐진 정경이 가히 조선제일의 풍광이었다. 남한수와 북한수가 만나는 저 아래의 양수리는 조물주가 그려놓은 한폭의 커다란 그림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이곳에 절의 흔적이 있으니 지난날 절이 피폐하여 나한님들이 당(堂)을 잃고 암굴에 드신 것이 안타깝도다. 아마 짐의 귀에 들린 종소리는 절을 다시 일으켜 세우라는 나한님들의 계시가 분명하니 팔도방백들은 속히 의논하여 이곳에 절을 지으라. 그리고 절 이름은 물방울 소리가 종소리로 울려 퍼진 뜻을 새겨 수종사(水鍾寺)라 함이 좋은듯 하다. 절 이름에는 나한님의 신묘한 위신력이 담겨 있음을 알고 속히 불사를 진행하도록."
임금은 이렇게 명하고 다시 암굴에 들어갔다. 빙그레 웃으시는 듯한 나한님들을 우러러 보며 자신의 죄업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청량한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임금은 한나절을 암굴 앞에 서서 산세와 양수리의 풍광을 즐기다가 두그루의 은행나무를 심고 하산했다.